미치게 예뻤던 겨울 운악산, 하지만 진짜 죽을 뻔했다
올겨울엔 눈이 정말 안 왔다. 그런데 2월 초, 유난히 포근하던 며칠이 지나고 갑자기 눈이 내렸다. 그 소식에 바로 짐을 챙겨 운악산으로 향했다. 평소에도 좋아하던 산이지만, 이상하게도 한 번도 ‘겨울 운악산’을 본 적이 없었다. 마침 하늘이 맑아질 거란 예보까지 있어, 이건 운명 같았다.
가평 쪽 공영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뒤를 돌아봤다. 구름이 걸린 산머리 위로 눈빛이 번졌다. 그때만 해도 몰랐다. 오늘 이 산행이 이렇게 강렬하게 기억에 남을 줄은.
처음엔 그저 눈길 걷는 기분이었다
주차장에서 포장길을 따라 오르기 시작했다. 초입은 현등사 입구까지 이어진 완만한 오르막. 눈이 3~4cm 정도 쌓여 있었지만, 발자국 소리가 포근하게 들려서 오히려 기분이 좋았다.
20분쯤 오르니 출렁다리 입구가 나왔다. 이 다리는 몇 년 전 새로 생긴 구간이라 나도 오랜만이었다. 사실 출렁다리를 그다지 좋아하는 편은 아니다. 산에는 굳이 없어도 되는 구조물이라 생각했는데, 막상 눈 쌓인 다리를 건너며 아래 계곡을 내려다보니 생각이 조금 바뀌었다.
하얀 가지 사이로 눈이 흩날리며 떨어질 때마다, 다리가 살짝 흔들렸다. 그 흔들림이 묘하게 살아 있는 듯 느껴졌다.
하늘이 열리기 시작했다
다리를 건너며 하늘을 보니, 구름이 천천히 걷히고 있었다. 운악산의 상징 같은 병풍바위는 아직 구름 속이었지만, 빛이 그 사이로 비치기 시작했다. 눈썹바위까지는 오르막이지만 크게 힘든 구간은 아니다. 앞서간 사람의 발자국이 눈 위로 희미하게 이어져 있어서 길을 찾는 데도 어렵지 않았다.
눈썹바위에서 잠시 숨을 고르며 뒤돌아봤다. 산 아래로 출렁다리가 작게 보이고, 멀리 가평 시내가 희미하게 빛났다. 바람이 불 때마다 나뭇가지에 쌓인 눈이 쏟아져 내려 눈보라가 됐다. 그 순간은 정말 ‘수묵화 속 한 장면’ 같았다.
그다음부터는 진짜 싸움이었다
눈썹바위를 지나면 길은 갑자기 험해진다. 쇠 난간과 호치케스 박음 구조물이 이어지는데, 겨울에는 이게 문제다. 눈이 얹혀 미끄러워지기 때문이다. 아이젠을 단단히 조였지만 그래도 불안했다.
오르막이 계속 이어지면서 숨이 점점 가빠졌다. 그래도 중간중간 전망대에서 보는 풍경이 그 수고를 다 잊게 만들었다. 구름 사이로 잠깐 보이던 연인산과 명지산, 그 아래로 얼어붙은 계곡. 사진으로는 절대 담기지 않는 빛이었다.
병풍바위에 다다를 때쯤, 드디어 구름이 열렸다. 파란 하늘 아래 하얀 나무들, 가지마다 붙은 상고대가 반짝였다. 진짜 미쳤다는 말이 절로 나왔다. 이렇게 예쁜 풍경은 설명이 아니라 그냥 고요히 서서 보는 게 맞았다.
미륵바위 앞에서 숨을 고르다
험한 구간을 넘고 나면 미륵바위가 나온다. 커다란 암석 위로 소나무들이 굽이굽이 자라 있는데, 흰 눈이 가지마다 얹혀 있었다. 눈꽃이 바람에 날릴 때마다 바위가 살아 움직이는 것 같았다.
그 순간 하늘이 완전히 열렸다. 파란빛이 쏟아지듯 내려오고, 멀리 만경대가 드러났다. 눈으로 덮인 능선들이 겹겹이 이어지는 모습은 정말 그림 같았다. 그렇게 또 한참을 서 있었다. 손끝은 시렸는데, 이상하게 몸은 따뜻했다.
이제부터가 오늘의 하이라이트였다. 미륵바위 이후부터 정상까지는 짧지만 가장 험한 구간이다. 계단이 생겨서 예전보단 수월했지만, 여전히 경사는 만만치 않았다. 몇몇 구간은 네 발로 올라가야 했다. 손이 얼어붙는 줄도 모르고, 철 난간을 붙잡고 기어오르며 혼잣말을 했다. “이게 뭐라고 이렇게 힘든데 즐겁냐.”
정상 직전, 하늘이 완전히 개였다
정상까지 2시간 조금 넘게 걸렸다. 마지막 계단 위에서 고개를 들자, 푸른 하늘이 시야를 꽉 채웠다. 그 순간 ‘복받았다’는 말이 절로 나왔다. 아래로는 미륵바위, 병풍바위 전망대, 그리고 출렁다리가 한눈에 들어왔다. 흰 산과 파란 하늘이 만나는 경계선은 진짜 수묵화가 아니라, 누가 만든 CG처럼 선명했다.
937m 정상석 앞에서 숨을 고르며 가만히 서 있었다. 포천 쪽 봉우리엔 아직 구름이 걸려 있었지만, 그조차도 운치 있었다. 눈이 녹기 전에 이런 날을 만난 게 얼마나 행운인지 새삼 느껴졌다.
하산길에서 만난 또 하나의 풍경
정상에서 현등사 방향으로 내려왔다. 능선을 따라가니 또다시 눈꽃이 피어 있었다. 바람이 세게 부는 자리마다 상고대가 두껍게 붙어 있었다. 두께를 손으로 재보니 1cm는 족히 되었다. 햇빛에 반짝이는 모습이 마치 유리조각 같았다.
남금바위 전망대에 도착하니, 만경대와 미륵바위가 다시 한눈에 들어왔다. ‘이제 다 내려간다’는 아쉬움보다, ‘이 풍경을 또 볼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려가는 길은 생각보다 가팔랐다. 얼어붙은 바위 위를 조심조심 내려가며, 눈길 한가운데서 만난 얼음폭포를 잠시 바라봤다. 자연이 만든 조각이었다. 그 앞에서 잠시 숨을 돌리며 손난로를 꺼냈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래, 이런 게 진짜 겨울이지.”
현등사 앞에서 만난 강아지들
하산길 끝에 현등사에 도착했을 때, 작은 강아지 몇 마리가 나를 반겼다. 낯선 사람을 보고도 꼬리를 흔들며 다가왔다. 눈 덮인 절집, 조용히 타는 향 냄새, 그리고 그 사이를 뛰어다니는 강아지들. 그 장면이 이상하게 따뜻했다.
출렁다리를 지나 주차장으로 돌아왔을 때는 3시간 35분이 지나 있었다. 거리로는 7.5km, 고도 차이는 764m. 하산 중엔 이미 햇살이 퍼져서 눈이 절반 이상 녹아 있었다. 정말 ‘타이밍’이라는 게 이런 거구나 싶었다.
결국엔 이 한마디로 정리된다
“예뻤지만, 진짜 죽을 뻔했다.” 운악산의 겨울은 그렇게 기억될 것 같다. 산 자체가 너무 멋졌고, 날씨운이 도와준 덕분에 평생 못 잊을 풍경을 봤다. 하지만 동시에, 겨울 운악산은 그만큼 험했다. 아이젠과 스틱이 없다면 절대 추천하지 못할 산이다.
그래도 묘하다. 다시 그날로 돌아가도 아마 또 오를 것이다. 복받은 날이었다. 겨울 산이 이렇게 예쁠 줄 몰랐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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